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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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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 (2023년 9월) Nowhere 8호 표지 및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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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 (2023년 9월) 철학의 시선 삶과 죽음, 그 기로에서의 단상(斷想) 

    삶과 죽음, 그 기로에서의 단상(斷想)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1. 한 갑자甲子를 살아보니나는 작년(2022)에 이른바 환갑을 맞았다. 그에 앞서 2021년도에 특정 기관으로부터 ‘경남의 전통음식과 전통주’라는 제목으로 책을 집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했지만, 그쪽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내가 상당한 적임자라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음식전문가가 아닌 인문학자가, 음식 레시피가 아닌 음식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위의 몇몇 사람들도 내가 그 글을 쓸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책을 집필하였는데, 책의 서술을 무겁게 하지 말라는 요청에 따라 중간 중간에 나의 경험담과 살아온 신상 이야기도 다소 포함되었다. 그 책의 「후기」에서 나는 나의 삶을 요약한 다음과 같은 글도 일부분으로 서술하였다.나는 미식가도 아니고 식도락가는 더욱 아니다. 술은 즐기고 많이 마시지만 안주조차도 별로 먹지 않는다. 원래 허약한 체질이라 입도 짧아서 가리는 음식도 많다. 더구나 화학조미료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몸이 금방 반응하여 속이 쓰리고 음식을 소화하는데 보통보다도 서너 배의 시간이 걸린다. 어려서는 몸이 너무 약하여 제대로 뛰놀았던 기억도 거의 없다. 숨이 거의 끊어져 산에 가져다 묻을 준비까지 했던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게다가 여섯 살 때에는 오른손등과 왼쪽다리 허벅지 그리고 왼쪽 등의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에 걸려 큰 수술을 하여 제거했는데 아직도 그 상처가 몸에 크게 남아 있다. 그 수술의 여파로 왼쪽 다리의 신경이 잘못되어 다리를 펴지 못해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될 뻔하였다. 대학병원에서도 치료하지 못한다고 한 것을 신줄을 받은 어느 여인이 손으로 만지기만 해서 나았는데, 지금도 100% 온전한 것은 아니고 나 자신만 아주 미세하게 느낄 정도로 약간의 불편함이 남아 있다. 선천적으로 신장이 건강하지 못하고 심장은 지나치게 강한 상태로 태어났다. 체질이 허약하여 한 가지 운동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고, 어린 시절에는 전 국민적 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이나 맨손체조의 마지막 동작이던 숨쉬기운동 정도가 내가 하는 운동의 전부였다. 누구도 내가 지금의 나이인 환갑이 될 때까지 살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가을에 넷째 형이 친구 2명과 더불어 학교에 가지 않고 중간의 동산에서 ‘땡땡이’를 치면서 놀던 중에, 무덤 아래로 한 줄로 지나가는 백사 세 마리를 잡아서 구워 집으로 가져와서 나에게 처음 미꾸라지구이라고 속여서 먹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크게 잔병치레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물론 몸이 남들만큼 건강한 상태는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별로 몸을 사용하여 돈을 벌만큼 건강한 체질을 지니지 못하여 그저 한 평생 공부를 벗으로 삼아 살아왔다. 전공은 동양철학에 흥미를 느껴서 ‘삼교회통론’과 ‘명리학’ 및 도교의 ‘내단수련론’ 등에 많은 시간을 들였고, 가장 많은 글을 남긴 부분은 ‘남명학’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늘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분야가 ‘한의학’이다. 허약한 체질 때문에 음식과 식재료 등을 공부하여 건강에 도움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중에서 순수하게 철학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한의학과 명리학에 관한 것이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의학에 대해서는 책을 쓴 것이 없지만 명리학에 대해서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그리고 그 후기의 끝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이 책의 내용 중 여러 부분과 후기의 내용은 내 삶의 과정과 삶 속에서 내가 했던 일들에 관한 기록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러니 앞으로의 삶은 지난 시절의 삶과는 그 방향이 많이 다를 것이다. 나는 이미 가까운 벗이자 아우인 사람에게서 나의 삶 이후의 안식처를 약속받았다. 조경수를 키우는 그의 농장은 산의 기운이 빼어나고 위치와 방향이 모두 수려하다. 그 산의 한 곳을 점찍어 내 유골의 수목장 장소로 정해두었다. 그러므로 봉분도 만들지 않을 것이며 비석이나 표지석 같은 것도 두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가 영원한 적멸에 머물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나의 자식에게도 일러두었다. 그래서 이런 기회에, 비석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지만 내 스스로가 나의 묘지명을 미리 지어 여기에 남기고자 한다. 타고난 천성은 곧은 듯 고약하고,스스로 수양은 덕 아닌 잔재주뿐!허약한 체질에 한 평생 술을 즐겨,가정에 무능했고 세상에 공 없네.하나의 온전함도 갖추지 못한 몸이,수많은 글과 말로 사람들 현혹했네.無極에 돌아가 三要를 막으리니,時運도 命運도 이제는 어쩔 건가!稟賦天性 若直實曲自勉修養 不敬少拙虛弱體質 平生豪飮治家無能 于世無功所俱精氣 一無穩全多少言說 眩惑世人回歸無極 要閉三關時運命運 奈何奈何그리고 작년 6월 ‘환갑달’을 맞이하여 그동안 이래저래 친분을 유지해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자축의 술자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졌다. 그런데 이게 한 달에 끝나지를 않아 8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그 뒤로도 평생 지녀온 나의 음주습관은 어쩌다 쉬는 날을 빼고서는 계속되었다. 2. 진갑을 맞아 죽음의 문턱을 다녀오고‘잠자고, 글 쓰고, 술 마시는’ 일상이 반복되던 금년(2023) 5월의 어느 날, 나는 한 밤중에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다 화장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소리를 듣고 아들이 달려왔고 나는 1분이 안 되어 정신이 돌아왔다. 병원에 가자는 자식의 말을 듣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출근도 못하고 하루 종일 굶은 상태에서 시커먼 액상의 물질을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내리기를 두 번 반복하고, 저녁 무렵 다시 화장실에서 고통을 못 이겨 정신을 잃었다. 애비의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들이 다시 달려왔고, 나는 또 1분 이내에 정신이 돌아왔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가면서 자식은 대원들에게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그들은 나의 의식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면서 응급실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진주시내 종합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만원이어서 어디에서도 받아줄 수 없다는 연락뿐이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처음부터 오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던 대학병원으로 향하면서, 응급실 밖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데 마음은 너무나 편했다.세상에 기적은 있었다. 환자가 넘친다던 대학병원응급실에 도착하니 바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때부터 모든 진료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X-ray, MRI, CT 등을 촬영하고, 뇌파검사도 이어졌다. 위에 이상이 있음이 확인되어 코를 통하여 호스를 위에 넣었다. 그 과정에서 호스를 통하여 위에서 시커먼 액상물질을 3L 정도 뽑아내고, 아래로도 많은 양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피와 위분비물 등이 혼합된 것이었다. 온 몸의 피가 거의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병의 원인은 위를 타고 지나는 정맥의 파열이었다. 나중에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파열된 부위가 3㎝ 이상 윗부분이었으면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는 말이었다. 지속적으로 수혈을 하면서 새벽녘이 되어 허벅지를 통한 ‘색전술’ 시술을 통하여 파열된 혈관을 봉합하는 시술이 끝났다. 금요일 새벽이었다. 입원실이 없어 응급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더니 또 운 좋게 입원실의 병상이 하나 나게 되어 응급동 병실로 옮겼다. 그 순간부터 월요일 의사의 회진 시간까지는 그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링거를 통해 피와 주사약 등을 맞으며 송장처럼 누워있어야만 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단지 물로 입을 헹구는 일만 허용되었다. CT와 뇌파검사를 다시 받는 중에 월요일 점심부터 물 마시기가 허용되었고, 화요일 점심부터 미음이 주어졌다. 나로서는 배고픔만 빼고는 몸이 정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같은 병원에 가까운 친척이 입원해 있어 어쩌다 연락이 되어 로비에서 잠시 만나보기로 하여 링거대를 끌고 내려가 기다리던 중에 극심한 ‘기립성저혈압’ 증세로 인하여 병원 복도에서 다시 혼절하였다. 몇 가지 검사 끝에 다른 이상은 없음이 확인되어 수요일 점심부터는 죽을 먹게 되었고, 목요일 오후 한 가지 검사를 끝으로 정확히 1주일 만에 퇴원하였다. 3. 새로운 삶의 시점에서 느낀 단상좀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작년에 나는 『우주의 원리, 운명의 비밀』이라는 명리학 책을 출판하여 세종도서로 선정된 바가 있다. 내 스스로 감정해 본 나의 사주에 ‘평생 세 번의 큰 수술을 해야 되는’ 운명이 있었다. 여섯 살 때와 스물일곱 살 때 큰 수술이 있었고, 금년의 이 일이 세 번째이다. 나의 감정이 맞는다면 이제 여든 두 살까지는 그럭저럭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듯하다. 인생의 3/4을 산 것이고, 20년이 남은 셈이다. 지금부터의 삶은 이전 삶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삶이란 생각으로 살아갈 것이다. 집에서 두 번 정신을 잃을 때, 나는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은 인간 정신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체험했다. 그 마지막 순간의 느낌은 너무나 평온했다. 나는 평소 삶과 죽음을 ‘에너지의 흐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죽음을 기뻐하고 삶을 괴로워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논리를 부정해왔다. 나의 생각이 옳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이제는 편안히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였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나의 이번 일에 술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전부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의사의 이야기는 술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라고 하였다. 나는 평소 약간의 위궤양이 있었고, 이것이 술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특정 부위의 증세가 악화되면서 마침 그 부위를 지나는 정맥에 자극이 되어 파열로 이어졌던 것이라고 한다. 나는 병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의 기억에 의하면, 수십 번도 넘게 같은 질문을 받았다. “술을 자주 드십니까?”, “주량은 얼마나 됩니까?”, “일주일에 몇 번이나 드십니까?” 나는 답은 이랬다. “자주 마십니다.”, “보통 두세 병 정도 마십니다. 많을 때는 다섯 병도 마십니다.”, “거의 매일 마십니다.” 그런 대답을 하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나중에는 누가 술 질문을 시작하면, 내가 먼저 “술은 소주를 거의 매일 두세 병씩 마시고, 많을 때는 다섯 병까지도 마십니다.”라고 미리 대답을 다 해버렸다. 그러면서 부끄러움도 조금씩 사라졌다. 술을 많이 마시는 일이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퇴원한 후에 나는 입원한 날부터 계산하여 한 달 동안 금주를 하였다. 스물일곱 살에 수술하고 난 뒤로 똑같은 날수만큼 내 인생에서 가장 장기간 금주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 술을 마신다. 대신 주량을 줄이려고 마음으로 노력은 하고 있으며, 특히 수소폭탄주로 마시면서 위장에 부담을 적게 주려하고 있다. 수소폭탄주란 물과 소주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한 술의 명칭이다. 술은 음식이고, 특히 기호식품이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즐기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나에게는 평생 술을 사주겠다는 친구가 둘 있다.병원에서 시술까지 마치고 난 다음 4일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을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물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니 물보다도 더욱 먹고 싶은 음식이 간절히 생각났는데, 바로 식혜였다. 물도 마시고 싶고 단 음식도 먹고 싶은 생각이 함께 생기니, 그 둘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이 바로 식혜였던 것이다. 퇴원 직전부터 시작해서 퇴원하고 한 달이 지난 기간 동안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마신 식혜의 총량보다도 더 많은 식혜를 먹었다. 그런데 그 식혜는 모두 지인들이 선물로 주었다. 어떤 친구는 내 평생 식혜는 책임지고 공급해주겠다고 한다. 대신 앞으로는 병원에 입원하여 자기를 놀라게 하는 일만 없는 조건으로!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 소식은 친인척을 비롯하여 어떤 벗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부득이하게 진주교대에 있는 벗과 셋째 형수로부터 전화가 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되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 순간부터 사방팔방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나는 물도 한 방울 마시지 못하여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인데, 안부를 묻는 전화에다 병원에 문병이 가능하냐는 전화까지 하루에 거의 70여 통의 전화를 받아야만 하는 곤욕을 치렀다. 사람이 두 번 다시 그러한 일로 병원에 입원할 일이 없어야 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도 있었다. 살면서, 그것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식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싶지 않은듯하다. 나는 늦게 결혼하여 아직 미혼인 아들과 딸이 있는데, 나의 노후와 사후의 일에 대해서 그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아직 어린아이로만 생각하던 아들이 이번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것은 그냥 나만의 생각임을 알았다. 나의 아들은 매우 침착하였고 일처리에 신중하면서도 꼼꼼하였다.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어쩌면 철없이 살아온 나보다도 더 믿음이 갔다. 회복기에 병실에서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사후에 필수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들과 내가 버리고 가는 육신의 처리에 대한 당부도 해두었다. 아들은 진지하게 들었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퇴원 후에야 자신도 “너무 당혹스러웠던 경험이었으므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하였고, 나의 사후 부탁에 대해서는 “아직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도 하였지만 이제 나는 이후의 삶이 든든하다. 나의 딸은 아직도 내가 그런 일을 겪었는지 모른다. 서울에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 당시나 그 후에도 딸에게는 그러한 소식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딸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였다. 나는 퇴원 후에 곧바로 내 주변의 번거로운 모든 일들을 정리하였다. 살면서 꼭 필요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금전관련 문제나 인간관계까지도 많은 부분을 정리하였다. 연금보험을 비롯한 일반보험 등은 정리하고, 전화요금과 국제구호기구에 내고 있는 약간의 기부금 그리고 건강보험 등만 내고 있다. 전화기에 남아 있는 2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도 정리하여 이제 5백 명도 남지 않았다. 해마다 더 줄여나갈 생각이다. 나의 벗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정년을 하였다. 다만 대학에 남아 있는 벗들은 아직 정년이 조금 남았고, 나도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학술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그런 벗들의 번호는 한동안 내 전화기에 남겨 둘 것이다. 이제 일반적으로는 특별히 과거와 다를 것은 없지만, 나는 나에게 주어진 남은 삶의 시간을 좀 더 느긋하게 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무 미련 없이 적멸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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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 (2023년 9월) 심층연구 생명체의 환경을 사유하기 

    생명체의 환경을 사유하기 문성균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Ⅰ. 문제의 도입캉길렘에 따르면, 환경(milieu)은 오늘날 생명체를 사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자 “현대인들의 사유의 범주”를 구성한다. 환경이라는 개념이 근대 생물학이 정립된 이후에야 과학의 대상으로 규정되었다는 사실과 이로부터 생명체를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존재자가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존재자로 표상하는 현대 생물학의 논의를 고려하면, 환경에 대한 캉길렘의 평가는 매우 정확할 뿐만 아니라 환경이라는 개념이 생명체들을 다루는 과학에서만큼이나 생명의 문제를 사유하는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생명에 대한 철학은 생명체를 영속적인 생성으로 사유한다면, 환경의 철학적인 의미는 영속적으로 생성하는 생명체에 대해 환경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혹은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해명함으로써만 드러날 것이다. 환경의 존재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사유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들뢰즈의 ‘문제’ 개념은 환경의 심층적인 위상과 의미를 펼쳐주는 것처럼 보인다. 베르그송과 시몽동에 대한 연구에서 들뢰즈는, 그들이 생명과 관련하여 ‘문제’라는 사유의 범주를 개념화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베르그송이나 시몽동과 들뢰즈 사이에 맺어질 수 있는 관계를 소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생명에 대한 들뢰즈의 사유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주의』에서 들뢰즈는 생명을 ‘문제-해결 과정’으로 규정하는데, 이러한 규정은 물론 생명에 대한 베르그송의 사유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생명이 문제-해결 과정이라는 모티프는 『차이와 반복』의 논의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시몽동의 논의를 참조하면서 개체화가 “어떤 준안정상태, 즉 적어도 두 이질적인 크기의 질서 혹은 두 이질적인 실재성의 단계들과 같은 어떤 ‘불균등화’의 현존을 가정”하고, 이러한 불균등화에 의해 “어떤 객관적인 ‘문제 제기의’ 장”이 나타나며, “개체화는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의 활동으로 출현”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들뢰즈가 베르그송이나 시몽동과 마찬가지로 생명, 즉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생성의 과정을 ‘문제-해결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생명을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들뢰즈는 유기체 혹은 생명체의 형태를 문제-해결 과정의 효과로 규정하게 된다. “유기체는 어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빛으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눈과 같이, 유기체의 분화된 각각의 기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유기체란 물질적인 요소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합되는 메커니즘의 인과적인 결과나 외부적이거나 내부적인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유기체를 형성하는 생물학적인 조직화를 어떤 메커니즘이나 목적에 묶어두는 지성의 논리는 생명을 어떤 선(先)-결정된 방향을 향해 전개되는 과정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생명이 이미 주어진 방향에 따라 전개된다는 인식은 항상 어떤 외삽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명에 대한 들뢰즈의 규정은 생명체와 환경의 관계를 내재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Ⅱ. 환경의 계보(학)생명체들에 대한 ‘과학’으로서 ‘생물학’이 성립한 이후에 생물학에서 논의되는 환경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마르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환경을 생명체를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개념이자 과학으로서 생물학의 대상으로 규정한 사람이 라마르크이기 때문이다. 라마르크의 생물학에서 환경은 그것의 이론적 기원으로 인해 역학적인 맥락에서 개념화된다. 환경은 물체들 사이의 원격 작용을 파악하기 위해 뉴턴 역학에서 유래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뉴턴은 원격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물체들 사이에 힘을 운반하는 매체로서 에테르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세웠는데, ‘힘을 운반하는 매체’라는 관념은 프랑스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물체들 사이의 공간을 의미하는 ‘환-경’(mi-lieu)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 수용되었다. 이후 환경이라는 용어는 라마르크에 의해 생물학에 도입된다. 생명체가 놓인 환경이 라마르크에 이르러 비로소 실증 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는 생명(체)에 대한 실증 과학으로서 생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라마르크가 “생명체에 작용하는 환경의 영향이 언제 어디서나 명백”하다는 “실증적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8세기에 이미 환경이 생명체의 변화를 유발하는 요인이라는 관념이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이 라마르크의 독창성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라마르크에 의해 환경이 생물학의 ‘과학적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라마르크의 생물학에서 환경은 생명체에 대해 어떤 작용을 하는가? 거기서 환경은 우선 생명체에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지리적인 ‘서식 환경’으로 파악되고, 이에 따라 생명체의 형태화와 변형을 추동하는 원인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고려된다. 이러한 개념화에 따르면, 생명체의 형태화와 변형은 생명체가 서식하는 환경의 끊임없는 변화에 의존한다. 라마르크에 따르면, 서식 환경에 의해 추동되는 생명체의 변형은 시간의 경과를 요구하는 일련의 연쇄적인 조직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라마르크는 풀이 거의 없는 건조한 환경에서 주로 나뭇잎을 뜯어 먹으며 살아가는 기린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먹으려는 욕구에 따라 자신의 목을 점차 늘린 결과 현재와 같이 변형된 목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서식 환경이 생명체의 내적 욕구를 변화시키면, 변화한 내적 욕구가 생명체의 행동이나 습성(habitude)을 변화시키고, 습성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생명체의 변형을 유발하는 연쇄적인 조직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생명체의 조직화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서식 환경에 의해 인과적으로 조건화됨을 보여준다. 생명체에 작용하는 환경의 존재를 ‘실증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생명체의 “다양한 형태와 습성의 진정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생명체가 “계속해서 마주치는 매우 느리게 변화하고 무한히 다양한 환경이 [생명체] 각각의 습성에 새로운 욕구와 필연적인 변화를 유발했음을 고려해야만 한다.”라마르크의 생물학에서 나타나는 환경의 역학적인 의미는 윅스퀼에 의해 근본적으로 전복된다. 윅스퀼은 생명체에 관한 물리-화학적 탐구 방식이 생명체를 “단순한 사물”로 만들면서 생명체의 고유성을 망각한다고 비판한다. 이와 반대로, 윅스퀼에 따르면, 생물학자는 생명체의 고유성을 생명체가 지각하고 행동한다는 사실, 그로부터 고유한 환경을 구성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윅스퀼은, 환경이 생명체를 점진적으로 구성한다는 라마르크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 생명체가 환경을 능동적으로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윅스퀼은 환경(milieu)과 주위(environnement)를 “주의 깊게” 구별한다. 윅스퀼에 따르면, 환경은 어떤 생명체에 고유한 지각과 행동이 전개되는 공간을 의미한다. 반면, 주위는 모든 생명체에게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지리적 공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별에 근거하면, 라마르크가 생명체의 변형과 관련하여 고려한 환경의 개념, 즉 역학적인 의미로 개념화된 서식 환경은 모든 생명체에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주위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반대로, 윅스퀼은 환경을 개별 생명체에게 고유한 의미 있는 공간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떤 생명체에 고유한 의미 공간으로서 환경이 생명체가 주위로부터 “선별적으로 뽑아낸 부분”이라는 점이다. 생명체는 자신의 주위에서 특정 부분들을 선별하고, 이렇게 뽑아낸 부분이 생명체에게 의미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점에서 생명체의 환경은 그것을 포함하는 주위로 환원되지 않는 본성상 차이를 가진다. 환경은 주위로부터 일종의 빼기에 의해 선별된 부분이지만 환경의 선별에는 생명체의 내부적인 요인들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진드기에 대한 윅스퀼의 연구이다. 윅스퀼의 진드기 연구에 따르면, 수풀 이파리 끝에 앉아 먹잇감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진드기는 눈이 퇴화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전반적인 감각에 의존해서 이동한다. 눈과 귀가 퇴화한 진드기는 후각에 의존해서 먹잇감을 지각하는데, 포유동물에서 방출되는 낙산 냄새는 진드기에게 먹잇감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을 향해 몸을 내던지라는 신호(signal)로 작용한다. 진드기가 감각된 낙산 냄새에 따라 몸을 던져 온혈동물 위로 떨어지면, 이후에는 촉각을 이용해 가능한 털이 없는 부분을 찾는다. 목표한 지점에 도달한 진드기는 온혈동물의 피부 조직 안으로 머리를 박고 피를 빨아들인다. 윅스퀼이 그려낸 진드기의 이미지는 진드기에게 고유한 환경이 외부 자극과 그에 따른 진드기의 감각-운동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드기는 주위에서 유래하는 다른 감각 자극들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하지만, 온혈동물의 낙산 냄새에는 적극적인 행동을 실행한다. 이러한 진드기의 행동 양상은 진드기가 단순히 외부 자극들을 기계적으로 수용하고 반응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모종의 욕구나 관심에 따라 외부 자극들을 선별해서 지각하고, 지각한 외부 자극들에서 유래하는 신호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자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자는 단순히 신경계의 생리적인 흥분작용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라기보다는, 내적 욕구와 관심에 따라 지각하고 행동하는 “기술자”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환경은, 캉길렘의 정의에 따르면, 주위로부터 생명체의 감각-운동 체계에 의해 분화되는 “신호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자극들의 총체”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생명체가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에서 살아간다는 ‘실증적 사실’을 고려할 때, 역학적인 개념화는 생명체를 ‘하나의 사물’로 고려하면서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물’인 환경에 의해 조건화되는 수동적인 존재자로 규정하고, 생물학적 개념화는 생명체를 ‘하나의 주체’로 고려하면서 자기에게 고유한 환경을 ‘하나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능동적인 존재자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들은 결국 생명체와 환경의 관계를 인식하는 생명과학자 혹은 생물학자의 경향을 보여준다. 역학적인 개념화는 생명체를 환경으로부터 유래하는 작용을 수용하는 기계로 간주하고, 이러한 기계를 물리-화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려는 생명과학자의 경향에서 유래할 것이다. 반면, 생물학적 개념화는 생명체를 기계와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자로 간주하고, 이러한 존재자에 어떤 능동성을 부여하려는 생물학자의 경향에서 유래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생명체와 환경에 대한 과학자들의 인식은, 과학에 대한 상식적인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과 달리, 순수하게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생명체에 대한 하나의 실천을 함축한다. 따라서 과학적 지성이 실재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이 아니라 단지 살아있는 과학자의 특정한 욕구와 관심에 따라 체계화되는 상대적인 인식만을 제공한다는 베르그송의 사유를 고려하면, 과학적 개념화가 환경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Ⅲ. 들뢰즈의 ‘문제’ 개념들뢰즈는 유기체의 구성 혹은 형태화를 문제-해결 과정으로 개념화한다. “유기체는 어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개념화에 따르면, 생명체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조직화 혹은 형태화는 생명체가 자기에게 고유한 환경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해결로서 규정되기 때문에, 환경 자체는 생명체에 대해 문제의 위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환경에 대한 이러한 개념화는 부분적으로 윅스퀼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해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윅스퀼은 환경을 생명체의 감각-운동 체계에 따라 구성되는 의미 공간으로 규정한다. 이는 생명체의 내적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환경이 무엇보다도 생명체가 감각적으로 ‘마주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환경의 구성은 생명체의 감각 기관과 주위에 산재하는 자극들 사이의 접촉과 그러한 자극들에 대한 생명체의 선별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마주침의 대상”을 재인식의 대상과 구별해 “오직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 즉 “어떤 기호(signe)”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기호라는 개념으로 들뢰즈가 가리키는 사태는, 구조주의 언어학이 규정하는 것처럼 실재와 유리된 “기표들의 연쇄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어떤 사태이다. 다시 말해, 기호는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체계 안에서 체계의 비대칭성과 이질성이 해소되면서 출현하는 일종의 효과로, 들뢰즈는 “비대칭적 요소들을 갖추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거느리고 있는 하나의 체계를 ‘신호’(signal)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 간격 안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것, 불균등한 것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어떤 소통 같은 것을 ‘기호’라 부른다. [그러므로] 기호는 분명 어떤 효과이다.” 마주침의 대상과 기호에 관한 들뢰즈의 논의는 환경의 구성과 관련한 윅스퀼의 개념화 방식에 철학적 엄밀함을 부여해준다. 다시 진드기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들뢰즈의 개념들을 참조하면, 진드기의 서식 환경에 상응하는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주위는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감싸고 있는 일종의 신호 체계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진드기도 우선 이질적인 신호들의 체계로서의 주위에 포함될 것인데, 진드기조차도 감각-운동 체계로 규정되는 한에서, 자기 주변에 분포하는 다른 신호와 마주쳐 어떤 구성 작용을 수행하기 전까지는 주위를 구성하는 이질적인 신호 체계의 일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이질적인 신호 체계 안에서 포유동물의 낙산 냄새와 진드기의 후각 기관이 접촉하면, 낙산 냄새가 진드기에 대해 번뜩이는 감각 기호로서 출현할 것이다. 이렇게 출현한 감각 기호는 진드기의 행동 양상을 조직화하는 조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환경의 구성을 체계들의 마주침으로 이해하면, 주위와 환경은 생명체와 관련해 고정된 항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캉길렘이 정확히 언급하였듯이, 주위와 환경은 생명체의 현재 감각-운동 체계를 중심으로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중심의 공간상 위치나 시간상 상태가 변화하면, 생명체의 주위와 환경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환경 자체의 심층적인 이중성이 드러난다. 주위는 이제 단순히 생명체에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지리적인 서식 공간이 아니라, 생명체의 위치 이동이나 내적 체계의 상태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인 공간, 다시 말해, 생명체에 대해 과거에 환경으로 구성되었던 공간이거나 미래에 환경으로 구성될 공간일 것이다. 따라서 이질적인 신호 체계로서 주위는 생명체의 잠재적인 환경을 이룬다. 반면, 신호 체계의 효과로 발생하는 기호와 같은 환경은 현재 안에서 생명체와 주위의 마주침으로부터 분화되는 현실적인 환경으로 규정될 것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분화되는 것은 현실적인 환경만이 아니다. 윅스퀼이 적절하게 파악하였듯이, 현실적인 환경은 마주침에 의해 비로소 생명체에 대해 ‘하나의 대상’으로 정립되기 때문에, 현실적인 환경의 분화와 더불어 구성되는 것은 생명체 자체의 ‘주체적 위치’이기도 하다.들뢰즈에 따르면, 현실적인 환경-기호의 중요성은 생명체가 “문제를 제기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 있다.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감각되어야 할 것 혹은 감성의 존재)은 영혼을 뒤흔들고 ‘곤혹스럽게’ 하며, 말하자면, 마치 마주침의 대상, 즉 기호가 문제의 운반자였던 것처럼, 마치 그것이 문제였던 것처럼, [영혼이] 어떤 문제를 제기하도록 강요한다.” 이는 생명체의 현실적인 환경을 규정하는 기호들이 무엇보다도 그것의 의미가 전개되거나 설명되어야 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기호란 항상 불분명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기호가 감싸고 있는 의미의 해석은 생명체에게서 행동의 방향을 조건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령 진드기의 행동 양상은 포유동물의 낙산 냄새를 ‘먹잇감’이라는 의미로 펼쳐내고 전개하는 과정에 의해 조건화된다. 포유동물의 낙산 냄새가 진드기에게서 ‘먹잇감’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다면, 진드기는 포유동물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과정에 의해 그러한 의미의 해석이 이루어지는가? 다시 말해, 환경-기호가 감싸고 있거나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어떻게 전개되거나 설명되는가? 들뢰즈는 여기서 사유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들뢰즈에게서 사유란 자발적으로 진리를 의지하는 능동적인 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마주침의 대상으로서 환경-기호에 의해 폭력적으로 강요됨으로써 출현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이고, 사유 안에서 강제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이다. 사유는 세계 안에서 불법 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따라서 사유의 참된 실행과 사유를 참되게 실행시키는 대상이 존재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진드기조차도 사유 역량을 펼쳐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환경-기호로부터 특정한 행동 양상을 조직화하는 한에서, 진드기는 감각된 낙산 냄새를 하나의 기호로 다루는 것이며, 그러한 기호에 함축된 의미를 찾으려는 사유의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서 사유의 참된 실행을 강요하는 환경-기호는 이념 혹은 문제로 규정된다. 철학적으로 문제는 “철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지성의 원천” 혹은 사유가 촉발되는 근원으로 개념화된다. 심지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과정은 생명 자체의 노력이라고까지 말해진다. 이러한 문제 개념의 역사적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아포리아(aporiā)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유가 마주한 근본적인 어려움으로서 아포리아는 그것의 해결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서도 얻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산출하는데, 이러한 느낌을 동반한 사유의 상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슬에 묶인 인간의 상태에 비유했다. 사슬에 묶인 인간처럼 어떤 대상과 마주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유의 상태가 바로 아포리아의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제에 대한 들뢰즈의 개념화 역시 기본적으로는 아포리아와 관련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어떤 마주침의 대상은 생명체에게 그것을 도저히 해결하지 못할 것만 같다는 느낌을 낳고, 생명체의 내적 동요 혹은 내적 불일치를 유발하는 그러한 느낌─이질감, 어지럼증, 현기증 등─이 결국에는 생명체를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문제를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문제를 아포리아와 관련하여 규정하는 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이념적 질서에 속하는 문제와 경험적 질서에 속하는 해결의 본성상 차이를 강조하는 동시에 문제 자체를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해결들의 출현을 조건화하는 선험적인(transcendantale) 심급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문제 자체가 해소되지 않고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해결 불가능한 상태로 존속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에 내적인 구조에 의해 부분적이지만 완전히 해결 가능하며, 이로부터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하나의 경우로서 해결이 현실화하는 것이다.차이의 이념적 종합에 관한 논의에서 들뢰즈는 어떤 문제가 현실적인 것들의 실질적인 발생 조건인 미분적 요소들과 그것들의 변별적 관계들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에 따라 비록 부분적이지만 완전히 규정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해결 가능성은 미분적 요소들과 특이성들이 할당된 문제의 내적 구조, 일종의 관계적 구조로부터 유래하며, 이러한 관계적 구조가 문제가 제기되는 형식을 조직하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 가능성은 문제의 형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마르크의 기린 사례는 기린에게서 나타나는 목의 형태화와 변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린의 내적 욕구와 서식 환경, 즉 빈약한 잔디들, 건조함, 높은 나무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은 기린의 조직화를 조건화하지만, 구성된 형태와 관련하여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경험되지는 않는 미분적 요소들로서,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신호 체계인 잠재적인 환경-신호에 분포할 것이다. 이러한 환경-신호 내에서 어떤 요소들과 기린의 감각-운동 체계가 접촉하면, 그로부터 기린의 현실적인 환경-기호가 분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환경-기호는 기린에 대해 나뭇잎 섭취 혹은 식욕과 관련한 문제─예컨대, 저기 있는 나뭇잎을 어떻게 섭취할 것인가? 혹은 식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를 제기하도록 만든다.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환경에 분포하는 미분적 요소들─빈약한 잔디들, 건조함, 높은 나무, 그리고 식욕과 같은 기린의 내적 요인들─과 미분적 요소들 사이의 변별적 관계에 상응하는 특이성─‘나뭇잎’이라는 기호─들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기린의 목이 점진적으로 높은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들을 섭취하기에 적합한 형태로 조직화하거나 변이하는 과정은 바로 그러한 문제-해결 과정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생명체의 환경은 이중적이다. 환경의 이중성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생명체의 잠재적인 환경-신호는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거느린 신호 체계라는 의미에서 미분적 요소들과 특이성들이 분포하는 문제 제기의 장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환경-신호에 분포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신호들은 생명체의 내적 체계에 의해 한정됨으로써 특이한 기호들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환경-신호는 현실화의 역량을 감싸고 있는 기호들의 체계라는 점에서 진정으로 잠재성의 영역에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 생명체의 현실적인 환경-기호는 환경-신호를 이루는 이질적인 신호들과 생명체의 내적 체계 사이의 강도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실제로 현실화한 효과들이다. 생명체의 내적 동요 혹은 내적 불일치를 산출하는 이러한 효과들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이렇게 출현한 문제는 그에 적합한 해결, 즉 환경-기호가 함축하는 의미를 특정 방향으로 조직화하도록 생명체를 강제한다. Ⅳ. 생명의 논리: 문제-해결 과정생명체의 환경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환경을 가로지르는 내적인 이중성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체의 환경은 단순히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서식 환경이나 생명체의 내적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공간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생명체가 거주하는 환경은 우선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이며, 그러한 공간 속에서 의미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의 이중성을 개념화하기 위해 우리는 들뢰즈의 개념들과 논리에 천착했다. 들뢰즈의 사유는 환경의 이중성과 그것이 생명체에 대해 갖는 위상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개념들과 논리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환경에 대한 고려로부터 생명체의 조직화는 생명체와 환경을 아우르는 생명의 잠재성이 분화하는 절차로 나타난다. 주지하듯이, 생명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는 “잠재성의 현실화”로 집약된다. 이러한 사유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가? 생명의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기 때문에, 이로부터 두 가지 태도가 유래하게 된다. 하나는 생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태도이다. 자콥에 따르면, 현대 생명과학의 실험실은 ‘생명체’를 탐구하기 위해 “생명을 묻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는, 생명체에 대한 분석적 태도에 저항하면서 생명을 일종의 규제적 원리로 개념화하고, 생명체에 대해 생명의 존재를 요청하는 태도이다. 여기서 생명은 실험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체의 전체성을 사유하기 위한 일종의 이념으로 고려된다. 이것은 생명을 생명체에서 출현하는 사건들을 지도하는 비물질적인 원리로 개념화하지는 않더라도 분명 생기론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생명에 대한 들뢰즈의 태도는 분명 생기론적이다. 들뢰즈는 『대담』에서 자신의 작업을 회고적으로 평가하면서 “내가 썼던 모든 것은 생기론적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러기를 바랐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 자체가 해석되어야 하는 하나의 기호이기는 하지만, 이와 관련해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잠재성의 현실화로 사유하는 들뢰즈의 작업이 생명체에서 출현하는 사건들에 상위의 통일성을 부과하지 않고서도, 그것들을 전체성의 차원─말하자면, 비유기적 전체성─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생명은 결코 유기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유기체 자체는 환경에 의해 조건화되며, 환경 자체는 유기체의 보존을 위해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유기체 내부에 이질적인 느낌을 산출하고, 그로부터 어떤 문제를 제기하도록 폭력적으로 강요한다. 생명은 비유기적이라는 들뢰즈의 규정이 의미하는 바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각주를 포함한 원문은 첨부된 pdf 파일을 내려받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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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 (2023년 9월) 인터뷰 ‘진리’보다 ‘즐거움’이죠, 과학철학자 정동욱 

    ‘진리’보다 ‘즐거움’이죠정동욱 교수 인터뷰인터뷰어 임미경, 차봉석8월 모일(某日), 2020년 3월부터 경상국립대 철학과에서 과학철학 등을 가르치고 있는 정동욱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전공과 연구 분야에 관하여인터뷰어 | 전공과 현재 관심사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정동욱 교수 | 제 전공은 과학철학이고 과학철학 중에서도 상당히 전통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과학의 합리성과 객관성을 해명하는 데 관심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의 해명은, 그동안의 과학사학자나 과학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고려할 때, 좀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해요. 따라서 과학의 역사적 변화와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인지적 한계, 예를 들면, 과학자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어떤 고유한 편향들 등을 다 고려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꼭 지켜야만 하는 그런 과학의 합리성과 객관성을 밝혀내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그거 말고도 최근에 새롭게 생긴 연구 주제는 서양근세철학인데, 원래 제 전공은 아닙니다. 전임자이신 정병훈 교수님이 서양근세철학, 그러니까 뉴턴, 흄 전공이시기도 하시고, 로크 책도 번역하시고 그러셨죠. 그래서 이제 저도 왠지 그런 걸 해야 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가지고요. 근데 막상 수업을 해보니까 저랑 꽤 잘 맞더라고요. 과학사의 가장 핵심적인 무대가 16, 17세기 과학혁명기인데, 근대철학이 다루는 시기가 보통 17, 18세기라서 시대적으로도 서로 연결이 많이 되고, 주요 인물들도 많이 겹칩니다. 데카르트, 로크, 라이프니츠 등은 알고 보면 과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었죠. 데카르트는 근대 역학 분야에서 기계적 철학을 주창한 핵심 인물이었고, 로크도 의사이면서 뉴턴과 많은 상호작용을 했던 사람이었고, 라이프니츠도 마찬가지죠. 그러다보니 제가 공부한 과학사/과학철학의 배경을 통해 근대철학사를 접근하면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 어려운 것들을 볼 수도 있고,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하다 보니까, 학생들에게 뭔가 저만의 방식으로 서양근대철학을 재구성해서 소개해 줄 수 있을 것 같고, 학문적으로도 뭔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도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 본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수업을 하면서 논문으로 써볼 만한 주제들을 찾고 있습니다.수업에 관하여인터뷰어 | 오랫동안 서울에서 공부하시다가 경상국립대학교에 부임하셨는데 소감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정동욱 교수 | 제가 2020년 1학기에 들어왔는데, 딱 코로나 시즌이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부임되고 나서 첫 경험이라고 하면 다 코로나 경험이고, 첫 두 해 정도는 거의 유튜버가 된 느낌으로 지냈습니다.(웃음) 그러다가 한 번은 첫해 봄쯤에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모르는 학생이 지나가다가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라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인터뷰어 | 학생들 다시 보게 됐을 때 굉장히 좋으셨겠어요.정동욱 교수 | 훨씬 재밌죠. 다만 방송용으로 만든 수업이 대면수업과는 수업 방식이 달라서 이것저것 많이 바꿔야 하는 게 힘든 점이었죠. 예를 들어, 수업시간 같은 경우에도, 방송으로 녹화를 해가지고 업로드를 할 때는, 학생들이 집중하기 어려우니까, 기왕이면 좀 짧고 굵게, 최대한 1시간 이내로 맞추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실제로 대면수업을 하면 그보다 길게 해야 하죠. 인터뷰어 | 수업을 할 때 선호하는 방식이 있으신가요?정동욱 교수 | 제 생각에는 학생들이 어쨌든 직접 뭔가를 해야지만 남는다고 생각을 해요. 예를 들면 수학이든 과학이든 자기가 직접 풀어봐야 남는 거지, 수업만 들어서는 소용이 없잖아요. 결국엔 다 자기가 직접 해봐야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문제는 제가 그런 수업을 잘 못해요.(웃음) 토론을 어떻게 시켜야 되는지, 제가 직접 배운 바도 없고. 아마 제가 대학 때는 수업을 안 들었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웃음)인터뷰어 | 수업을 잘 안 들으셨나요?정동욱 교수 | 대학교 때는 점수가 거의 백화점이었죠.(웃음) 그게 A+부터 F까지, 저희는 +, 0, -가 다 있었어요. 그 모든 종류의 학점이 다 있었거든요. 심지어 D도 +, 0, -까지 다 있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부터는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리고 심지어 정식 철학 수업도 들어본 적이 별로 없고.그래도 어쨌든 이러저런 상호작용도 하고, 토론도 하고, 직접 자기가 읽고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강의할 때는 다 주입식으로 하죠.(웃음) 그래도 완전히 주입식이라기보다는, 이해를 최대한 시키려는 방향에서 사례를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편입니다. 좀 최대한 재미나게요. 제가 과학을 약간 마니아틱하게 좋아하기도 하고, 거의 사례 자판기처럼, 과학사나 과학철학에서 등장할 만한 여러 사례들이 거의 뭐 툭 치면 탁 나오는 것 같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좀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시키는 데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인터뷰어 | 철학 공부에서, 특히 과학철학 공부를 위해 필요한 소양 같은 게 있을까요?정동욱 교수 | 철학, 특히 과학철학을 위해 필요한 소양 같은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어떤 과학 분야를 부전공하듯이 뭔가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자기가 분석하려고 하는 어떤 대상이 있다면, 예를 들면, 생물학 내에서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그거에 대해서는, 내가 그냥 전문가의 어떤 권위에 호소해서 그걸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람만큼이라도 이제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갖추는 비판적 평가자는 될 수 있을 정도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나도 그것을 평가할 자격이 있고, 지금은 못하더라도 공부한다면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 정도는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교과서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화의 문제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고 한다면, 어쨌든 그 연구를 시작하려면, 교과서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하죠. 하지만 전문 연구자처럼 그 연구를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숙련, 예를 들어 실험 기구를 다루는 법 같은 것까지 배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알려져 있는 지식들을 가지고, 어떤 연구 발표가 있으면, 그걸 읽고 그 안에서 논리적 관계를 평가하면 되는 거죠. 사실 전문 연구자들조차도 남의 연구를 평가할 때는 약간 아마추어의 자세에서 평가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 점에서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어 | 학생들과 수업 외적으로 스터디를 꾸린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정동욱 교수 | 이게 수업 말고 하는 거니까 너무 빡세면 안 될 것 같고,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게 하는 쪽으로 해야 할 것 같네요. 제가 보기에, 철학과 학생들이 과학에 겁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좀 과학에 친근감을 줄 수 있는,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그런 책들을 같이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기적 유전자』 또는 『아름다움의 진화』 같은 책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인터뷰어 | 철학, 또는 과학철학이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시나요?정동욱 교수 | 제가 생각하기에, 철학이라고 하는 게 되게 다양한 사고방식들의 모음이죠. 똑같이 철학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정말 다른 얘기들을 다 철학이라면서 하고 있죠. 알고 보면 이게 인류가 창안해 낸 수많은 사고방식들의 보고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여기서 철학을 잘만 배운다면) 자신의 어떤 좁은 사고방식의 틀을 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열린 마음과 끈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철학 수업에서는 내가 평소 가지고 있는 생각과 거리가 있는 아이디어를 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내가 평소 가진 생각과 대충 섞어서 이해하면 그 아이디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그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만 얻게 되지요. 머리를 바꿔 낀다는 생각으로, 또는 모드를 전환한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사고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죠.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인터뷰어 | 혹시 과학철학과 관련해서는요?정동욱 교수 | 현대 사회가 과학이 너무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회잖아요. 가끔씩 과학이라는 말을 수식어처럼 사용해서, 남들 욕할 때 비과학적이라고 욕하고, 자기가 하는 것을 내세우고 싶을 때 우리가 하는 건 과학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게 너무 과장된 얘기일 때도 많거든요. 그래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직접 과학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과학이라는 거에 대해서 뭔가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과학철학이란 수업이 학생들에게 과학을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거나,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불신하거나 하는 극단적인 태도들로부터 벗어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공부의 계기, 여정인터뷰어 | 어떻게 해서 과학철학을 전공하시게 되셨나요?정동욱 교수 | 이 질문을 많이들 물어봐서 약간 정해진 답이 있습니다.(웃음) 제가 97년에 서울대 컴공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안 했죠. 거의 학부를 6년 다녔는데, 6년 동안 공부보다는 맨날 데모 나가고 그랬습니다. 망해가는 학생 운동을 마지막 끝자락까지 붙잡고 있었던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때 맑스주의 철학이랑 맑스주의 경제학 공부하고, 사회과학 일반에 관심을 좀 가지긴 했었죠.그렇게 있다가, 졸업 직전까지도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였고, 결국 졸업 후 백수가 됐습니다. 그렇게 백수가 돼서 농구공 들고 대운동장 가서 사람 수 채워지면 3대3, 4대4 농구하면서 놀고, 그러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뭐 하는 짓이냐고 그랬죠. 그러다가 누가 ‘공부나 더 해보지?’라고 해서 대학원을 가볼까 했죠. 그때 생각한 건 경제학, 철학 이런 거였는데, 막상 하려니까 거기에 전문 지식도 없고, 잘할 자신은 딱히 없고 그랬죠. 그러다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 간 사람이 있었어요. 거기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분 만나서 거기 뭐하는 곳인지, 들어가려면 뭘 해야 되는지 물어봤더니, 학부 세미나라고 하는 거 좀 참여하고, 그 다음에 거기서 개설한 교양수업들 좀 청강하고, 에세이 쓰고 들어오면 된다고 해서, 열심히 준비해서, 수업 듣고, 학부 세미나도 듣고, 그러고 들어갔죠.그때 추천을 받은 책이 장회익의 『과학과 메타과학』이랑, 그 다음에 학부 세미나 때 읽은 책이 앤서니 그래프턴의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이었는데, 그 책 너무 재밌는 거예요. 과학과 메타과학도 읽어보니까 너무 재밌고. 내가 알고 있던 거랑도 잘 연결이 되고. 과학사 개론이라고 하는 그 교양 수업도 너무 재밌고. 알아볼수록 여기가 딱 맞다는 생각이 들었죠.또 제가 당시에 관심 가졌던 주제 중 하나가 ‘맑스 경제학도 과학일까’, ‘만약 가치가 노동에서 나온다면, 그것을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 이런 거였는데, 그런 질문들이 알고보면 과학철학과 관련이 깊은 인식론적 질문이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 과학, 특히 물리를 좋아했었는데, 그 때의 관심 중 일부는 상당히 과학철학적인 관심이란 걸 깨달았죠. 당시 물리경시대회 준비하면서 본 기출 문제 중에서 뉴턴의 세 가지 법칙에 관한 게 있었어요. 제1법칙, 제2법칙, 제3법칙이 있는데, 왜 뉴턴의 제1법칙이랑 제2법칙이 따로 있냐는 거였죠.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고 제2법칙은 F=ma잖아요. 그런데 관성의 법칙은 힘이 가해지지 않을 때 물체는 직선 등속 운동을 한다는 얘기인데, 그런데 그건 제2법칙에서 F가 0일 때의 상황이고요. F가 0이면 a가 0이다. a가 0이라는 건 가속도가 0이니까 결국 등속 운동을 한다는 거죠. 그러면 제1법칙은 제2법칙의 특수한 사례니까, 따로 있을 필요 없는 거 아니냐, 제2법칙만 있으면 되는데 왜 제1법칙 써놨냐 이런 문제였죠. 당시에는 되게 기발한 문제라 생각해 가지고 한참 고민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런 질문들이 알고보면 과학철학, 특히 물리철학의 문제였어요. 하여튼 ‘과학철학’이란 걸 대학원에서 공부해볼까 마음먹는 순간, 과거의 그런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마음을 굳히게 했죠.그런 질문들 중에는 물리학의 기본 개념에 관한 질문도 있었어요. 예를 들어, 도대체 힘은 뭐고 질량은 뭐냐고 물어보면, F=ma를 이용해 이런 식으로 답할 수 있죠. 어떤 물체(m)를 가속(a)시키는 어떤 원인, 물체의 운동을 변화시키는 원인이 바로 힘이다. 그럼 질량은 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답할 거냐. 이것도 F=ma를 이항한 m=F/a를 이용해, 질량이란 힘에 대한 관성량이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질량이 크다고 하는 거는 힘을 가했을 때 운동 변화가 작은 애다. 질량이 작다는 건 무슨 뜻이냐. 힘을 가했을 때 운동 변화가 크다는 거다. 근데 이렇게 얘기하면 질량을 힘에 대한 관성량으로 이해하고, 힘을 운동 변화의 원인이라고 이해하는 건데, 사실 순환논증이거든요. F=ma에서 뭘 좌변에 두느냐에 따르는 거죠. 그러면 이 법칙은 경험적으로 애초에 입증이 불가능한 가정 아닌가 하는 식의 생각을 고등학교 때부터 했었는데, 이런 게 과학철학에서 계속 등장해요. 그래서 내가 고민하는 걸 여기서 공부하면 되구나, 내 관심들을 여기서 해결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인터뷰어 | 공부를 하면서 재밌었거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정동욱 교수 | 기본적으로 맨날 술만 마셨죠.(웃음) 한 10시만 되면, 학교 근처에서 자취해서 살았으니까, 대체로 기숙사에 사는 친구나 거기서 자취하는 친구들 중심으로, 늦게까지 공부하고 있다가, 연구실 돌면서 한 잔 할 사람 모아 가지고 가서 맨날 술 마시고 그랬습니다. 과학철학 말고도 과학사 수업을 많이 들었죠. 기술사 수업도 듣고, 물리학사 수업도 듣고, 여성과 과학기술도 듣고. 그런데 철학 수업을 너무 안 들어 가지고 철학 베이스가 너무 적습니다. 결국은 뭐 과학사 하는 친구들이랑 많이 어울려 다녔고, 그래서 결국 과학사 전공의 선배와 결혼도 하게 됐습니다.(웃음)인터뷰어 | 인생의 목표나 가장 최근에 있었던 재밌었던 일이 있으신가요?정동욱 교수 | 주어진 거나 열심히 하면서 좀 이렇게 어떻게든 사고 안 치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게 목표라고 할까요. 제가 항상 닥치면 일을 하는 타입이라, 민폐 끼칠 가능성이 상당히 있거든요. 최근에 재밌었던 일은 잘 모르겠네요. 강의 준비하는 거는 재밌었던 거 같아요. 새로운 강의 주제들로, 서양근세철학사 준비했던 것도 재밌었던 것 같고, 문화철학 준비하는 것도 재밌었던 것 같고. 이미 했던 강의 다시 하는 것보다 새로운 강의 준비하는 게 힘은 들더라도 오히려 재밌더라고요. 인터뷰어 | 그래도 어떤 태도로 살아가겠다거나 하는 마음가짐이라거나.정동욱 교수 | 제가 생각하기에 교수로 산다는 건 일종의 엔터테이너랑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가수나 배우와 마찬가지로 교수도 학생들 또는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걸로 먹고 사는 거죠. 이게 사실은 유물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대학교수인 제가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게 아니니까, 결국 누군가 생산한 걸 제가 어떻게든 같이 얻어먹고 사는 셈이잖아요. 즉 저에게 뭔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돈이 돌다가 결국 제 월급으로 들어오는 건데, 그럼 도대체 저에게 돈을 받을 만한 자격이 도대체 뭐냐 생각해 보면, 일차적으로는 수강생이나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다만 가수나 배우랑 다른 점은, 이제 즐거움의 종류가 지적 즐거움인 거고, 그게 장기적으로 보면, 아까 얘기했던 과학에 대한 뭔가 균형 잡힌 시각들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도움이 된다거나 뭐 그런 게 되면 좋겠다는 거죠. 그러니까 밥 벌어먹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학생들에게 세계의 진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재미는 줘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거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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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 (2023년 9월) 카툰 만화로 보는 데모크리토스 

    글, 그림 차봉석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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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 (2023년 9월) 일상공감 #3 보람있는 삶을 위하여 

    보람있는 삶을 위하여 2023년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학문후속세대 발표 참가 후기 윤준식 서울대 윤리교육학과 박사과정 참가 계기와 준비 홈페이지의 ‘행사안내(학회모임)’ 페이지에는 철학 유관 분야의 학술 행사 안내 게시글이 수시로 업데이트된다. 올해 초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홈페이지에 접속했고, 2023년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학문후속세대 발표자를 공모한다는 게시글을 확인하게 되었다. 곧바로 학위논문 작업과는 거리가 있지만 꽤 오랜 기간 고민해온, 그러나 투고 가능한 학술 논문의 분량으로 작성할 만큼의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주제가 떠올랐지만 ‘그래, 지도교수님 말씀대로 학위논문 작성에나 집중해야지.’ 생각하며 마음을 거의 접었었다. 그런데 접수 마감 몇 주를 앞두고 지도교수님께서 전공 단체 카톡방에 발표자 공모 소식을 알리시며 전공생들의 참여를 은근히 권유하시는 것 아니겠는가? 날 염두에 두신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모종의 ‘계시’를 받은 느낌이었다. 3월 30일 발표 신청서를 제출하고 4월 11일에 발표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문제는 원고 제출 마감일이 4월 23일이라는 것... 그나마 11포인트 5쪽 이내라는 분량 제한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주일에 걸쳐 작성한 초고를 전공 세미나에서 발표하고, 교수님과 동료 선생님들로부터 받은 피드백을 반영하여 이틀 동안 꽤 많은 부분을 뜯어고친 후 최종본을 늦지 않게 제출할 수 있었다. 서양철학 세션에서 이루어진 내 발표의 제목은 “보람있는 삶을 위하여: 보람 개념에 대한 분석적 접근”이었다. 신청서에 기재했던 제목은 “보람있는 삶을 위하여: ‘보람없음’ 감정의 부적절성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이었고, 이것이 내 원래 문제의식을 더 잘 드러내는 제목이긴 했다. 가까운 누군가의 성공을 위해 나름 애썼는데 그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참 보람이 없네...”라는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는 내 말에 상처받았고, 나 스스로도 내가 그런 식의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했다. 윤리학 연구자인 만큼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를 좀 더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맥락에서 풀어보고 싶었다. 초고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전면에 드러났는데, 전공팀 선생님들은 ‘보람’이라는 개념에 대한 철학적‧윤리학적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는 만큼 조금 더 중립적인 관점에서 보람 개념 및 관련 현상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글이 전개되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주셨다. 그래서 ‘보람없음’이라는 특정한 감정의 ‘비윤리성’에 집중하는 대신, 감정으로서의 보람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 및 이에 기초하여 우리는 언제 보람과 보람없음을 느끼는지, 보람있는 삶을 위해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태도 혹은 자세는 무엇인지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식으로 글의 구성을 수정했다. 확실히 글이 깔끔해졌고, 덕분에 발표 준비도 훨씬 수월해졌다. 발표 방식들: ppt? 발표문 읽기? 박사과정을 수료했던 2021년 여름의 첫 번째 발표부터 작년 그리고 올해의 학문후속세대 발표까지 총 세 번의 학술대회 발표 모두 ppt를 사용하였다. 2021년과 2022년에는 비대면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고, 올해에는 발표문 분량도 짧고 무엇보다 대면으로 진행하기에 이번에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ppt 없이 발표문을 읽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발표가 20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다는 점, 전공 분야가 다른 분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 무엇보다 내 발표의 내용이 많은 가상 사례로 구성되어 있고 삽화 사용을 통해 핵심 논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ppt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따로 발표 대본을 작성하지는 않았고 ppt를 넘겨 가며 발표를 진행했는데, 덕분에 20분 이내라는 시간 제한을 지킬 수 있었다(녹음 파일을 통해 확인한 정확한 발표 시간은 19분 15초였다). 위와 같은 고민이 있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다른 참가자 분들의 발표 방식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나처럼 ppt를 준비한 분들도 계셨지만, 더 많은 분들이 원고를 부분부분 읽고 부연하는 방식으로 발표를 진행하셨다. ppt 발표자들의 경우 큰 편차가 없었던 반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신 분들의 경우 발표자의 성향과 준비도에 따른 어느 정도의 편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전달력과 장악력이 뛰어났던 발표자는 ppt를 사용하지 않았다. 텍스트를 통해 보다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연구사적이고 이론적인 부분은 과감히 넘어가고, 발표문의 중후반부 이후 자신의 논지와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을 가장 공들여 읽고 필요한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진행하셨다. 정말 말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니 발표자는 물론이고 청중의 입장에서도 매우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발표들 중 발췌하여 읽는 부분이 사전에 특정되지 않았거나 부연 설명이 너무 길어지는 경우, 원고를 처음부터 주욱 읽어서 정작 중요한 부분의 논지는 시간이 모자라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 등은 조금 아쉬웠다. 논평들, 정면교사와 반면교사 내 발표의 논평을 맡아주셨던 선생님은 직접 발표 장소에 오셔서 대면으로 논평을 진행해주셨다. 논평자 선생님의 코멘트는 근래에 발표문을 논문으로 확장할 때 예상 반박과 재반박을 다루는 부분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실질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발표와 논평이 끝나고 연락처도 알려주시고 이후 스터디 모임이나 공동 연구까지 제안해주셔서 무척 감사했다. 확실히 대면 방식의 학술 모임이 이런 식으로 지속되고 발전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데에는 강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논평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는데, 논평 그 자체로만 보면 대면, 비대면의 형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발표문 작성은 물론이고 전공 연구 전반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논평자가 발표문에 대해서 그리고 더 넓은 주제의 연구에 대해 코멘트하고 발표자가 이에 대해 감사해하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기까지 하였다. 전공 분야가 같지는 않지만 조금은 다른 시선에서 생각하고 파고들 여지를 제안하는 논평자의 코멘트도, 그것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큰 의미가 있었다. 가장 안 좋았던 경우는 대면으로 참석한 논평자가 발표자에게 호통을 치는 상황이었다. 논평자의 의도는 알 수 없을 뿐더러, 충분히 선해(善解)할 여지도 있다. 실제로 해당 발표자의 준비는 객관적으로도 미흡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정도의 적절성은 중요하다. 논평자 스스로가 타당한 학술적 글쓰기의 기준에 입각하여 논평에 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논평 기준이 무엇이고 발표문의 어떤 부분이 어느 만큼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지 설명하면 된다. ‘과정생은 지도교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게 원칙’이고 ‘내 말은 그냥 흘려들으면 된다’는 밑밥을 깔면서 ‘학부생만도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논평이 아니라 그저 인격모독적인 폭언일 뿐이다. 철학적 폭언, 계몽의 매? 모두 형용 모순이다. 하시고자 하는 작업이 철학이 아니고 의도한 바가 계몽이 아니라면 일관성 유지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물론 논평자의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쉬움과 기대, 그리고 보람 많은 학문후속세대들에게 기회를 주려다 보니, 한 사람의 발표 세션에 할당될 수 있는 시간이 30분(20분 발표 + 10분 논평)밖에 안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논평자의 비판적 코멘트에 발표자가 재반박하고, 논평자 이외의 청중들의 질문에도 응답하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발표자의 이후 연구에도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매우 다른 전공 분야와 주제의 발표에서도 문제 의식의 측면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래 연구자로서의 동질감, 공감, 유사한 방향성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철학과에 단 한 번도 적을 두어 본 적 없는 사범대 대학원생으로서, 철학자연합대회의 학문후속세대 세션 발표자로 선정되고 여러 뜻깊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기초 학문 존폐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이렇게 또래 연구자들이 각자의 진지한 학문적 열정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보다 많은 기회가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이후의 학문후속세대 학술 연구 모임의 기획 및 참여에 미약하게나마 기여한다면,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윤준식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일반사회교육과 윤리교육을 전공했고,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칸트의 도덕적 진보 사상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 취득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3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공교육 현장에 몸담았고, 현재는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생의학적 도덕 향상에 대한 학위논문을 준비하며 생명윤리, 기술윤리 분야의 여러 주제들로 연구 관심을 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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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 (2023년 9월) 일상공감 #2 인물들로 돌아보는 철학자연합대회 학문후속세대 발표 

    인물들로 돌아보는 철학자연합대회 학문후속세대 발표2023년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학문후속세대 발표 참가 후기윤유석 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1. 이승종 교수님: 발표에 참여하게 된 계기2월 초에 지도교수님이신 이승종 교수님께서 한국철학자연합대회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5월에 있을 한국철학자연합대회에서 발표를 맡으셨다고 하시면서, 학문후속세대를 위한 섹션도 있으니 저도 지원해 보라고 권유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교수님께서 전해주신 한국철학자연합대회 소식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사실, 대학원생에게는 공부한 내용을 공적인 자리에서 발표할 기회나 그 내용에 대해 공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기회가 그다지 많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직 학위 과정을 다 끝내지 못한 ‘학생’의 신분으로는 교내 수업이나 교내 행사를 벗어나는 학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함께 의견을 교환할 동료 대학원생들이 학교 안에 많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공부한 내용을 어느 누구에게도 검토 받을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세부 전공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혼자 자료를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글을 써야 하는 일들이 빈번해집니다. 저 역시 이러한 아쉬움을 자주 느껴서 발표나 논평의 기회가 생기면 가능한 한 참여하고자 하였습니다. 특별히, 이번 발표는 국내의 대표적인 철학 학회들이 모두 모이는 행사에서 이루어지니, 발표자로 선정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발표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공부한 내용을 알릴 수도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2. 박이문 교수님: 바기데거와 하이데거를 비교한 이유이번 발표에서 박이문 교수님의 하이데거 해석을 다루어야겠다고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래는 ‘초월론적 현상학(transcendental phenomenology)’이라는 맥락에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해설하고 비판하는 글을 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발표 신청서에 적힌 이번 대회의 주제가 ‘현대한국철학의 과거·현재·미래’인 것을 확인하고서 하이데거와 깊은 관련이 있는 ‘현대한국철학자’인 박이문 교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실, 한국철학에 대해 그동안 제가 접한 대부분의 강의나 글들은 원효, 이황, 정약용 같은 너무 오래 전의 사상가들을 요약하는 데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인물들을 연구하는 작업도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우리 시대의 한국에서 제시된 흥미로운 담론들이 ‘한국철학’을 다루는 강의와 글에서조차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는 점은 저에게 항상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특별히, 박이문 교수님의 하이데거 해석이 현상학과 해석학을 전공하는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논의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박이문 교수님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명료하게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사유를 독창적으로 비판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박이문 교수님의 하이데거 해석에는 일반적인 연구자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개성 강한 주장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지만, 이러한 내용들까지도 국내 하이데거 연구의 고유한 성과라고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닙니다. 마치 미국의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의 하이데거 해석이 종종 지나치게 자의적이어서 ‘드레이데거(Dreydegger)’라고 불리기까지 하더라도, 미국에서 하이데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드레이데거’ 속에 담긴 철학적 통찰을 존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발표를 통해 박이문 교수님의 하이데거 해석을 ‘바기데거(Parkyidegger)’라고 명명하고서 그 의의와 한계를 주변에 소개하는 작업을 수행해보고자 하였습니다.3. 이주희 선생님: 논평을 통해 배운 내용논평을 맡아주신 경상국립대 이주희 선생님은 감사하게도 발표문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정말 꼼꼼하게 읽어주셨습니다. 또한 제가 발표문에 미처 담아내지 못한 내용들을 포착해내어 유익한 조언과 예리한 비판을 제시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사유가 탈인간중심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도, 제가 박이문 교수님과 하이데거를 비교하는 작업에서 ‘탈인간중심주의’라는 주제를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지적은 정말로 날카로웠습니다. 저의 발표문 내용만으로는 하이데거가 마치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한 철학자인 것처럼 잘못 생각될 수 있는 소지가 많았습니다. 저는 “대상이 존재한다.”라는 사태와 “대상이 인식 주체에게 주어진다.”라는 사태 사이의 공속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대상의 존재를 인식 주체인 인간이 능동적으로 구성해낸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표현들을 발표문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탈인간중심주의는 2010년대 이후에 철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사조들인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객체지향 존재론’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만큼, 하이데거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들이 주의를 기울여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퀑탱 메이야수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상관주의(correlationism)’라는 일종의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에 매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레이엄 하먼은 하이데거의 철학이 ‘객체들의 형이상학’이라는 탈인간중심주의적 사유를 품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판하는 인물이나 옹호하는 인물이나 모두 ‘탈인간중심주의’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논의를 펼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탈인간중심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주희 선생님의 논평은 제 발표문의 논의를 오늘날 하이데거 연구의 핵심적 쟁점과 연결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저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4. 이하영, 김주용, 윤준식, 이지형 선생님: 흥미로운 발표들학문후속세대 발표에 참여하여 다른 대학원생들의 훌륭한 연구를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정말 유익하였습니다. 특별히, 저의 철학적 관심사와 관련해서는 크게 네 분의 발표가 기억에 남습니다. (a) 이하영 선생님은 후설의 현상학에서 ‘본능(Instinkt)’ 혹은 ‘충동(Trieb)’ 개념이 이성 개념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후설의 사후 유고에 근거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후설의 현상학을 통해 ‘합리성/비합리성’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발표문의 내용도 흥미로웠고, 프레젠테이션을 활용한 깔끔한 발표 진행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b) 김주용 선생님은 아도르노의 ‘형상금령(Bilderverbot)’ 계율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대안적 해석을 제시하셨습니다. 영미권 과학철학의 맥락에서 등장하는 뒤앙-콰인 논제를 통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소개하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c) 윤준식 선생님은 우리가 언제 보람을 느끼고 언제 보람 없음을 느끼는지를 바탕으로 ‘보람’이라는 개념을 분석하셨습니다. 영미권 도덕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한 연구였지만, 이러한 연구는 일종의 ‘보람에 대한 현상학’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d) 이지형 선생님은 니체의 ‘아곤(Agon)’ 개념을 통해 오늘날의 능력주의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얼핏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니체의 철학이 정반대로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를 들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윤유석연세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생. 해석학을 중심으로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가다머, 데리다, 브랜덤, 맥도웰 등 잡다한 철학자들을 공부하고 있다. 「부정신학 없는 해체주의를 향하여: 해체를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과 「사용 이론과 회의주의를 넘어서: 비트겐슈타인의 정적주의」 등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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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호 (2023년 9월) 일상공감 #1 내가 감히, 정말? 그 후 

    내가 감히, 정말? 그 후2023년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학문후속세대 논평 참가 후기이주희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내가 감히 논평을?’ 한국철학자대회가 열리기 2주 전, 주최 측으로부터 논평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황한 나는 본인은 박사과정생이며 혹시 잘못 알고 연락하신 게 아닌지 재차 확인했다. 원래 나는 학문후속세대 분과에서 발표를 맡은 동기 선생님도 응원하고 하이데거학회 발표도 들을 겸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관계자께서 대회 사정상 논평자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며 동료평가라는 의미도 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셨다. 곧바로 지도교수님께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다. 이상형 교수님의 반응은 간명했다. “그냥 하면 됩니다.” 무심한 듯 던지는 교수님의 말씀 뒤에는 늘 세심한 조언과 격려가 뒤따른다. 그 말씀의 깊이와 의미를 또 한 번 신뢰하기로 했다. 그렇게 단연코 나의 영역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논평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정말 해도 되는 걸까?’ 논평을 맡은 발표문(윤유석, 「하이데거와 바기데거: 박이문의 하이데거 해석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박이문이라는 한국현대철학자의 하이데거 독해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내용이었다. 발표문에는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박이문의 해석에 대한 발표자의 비판’이라는 3중의 검토가 흡인력 있는 문장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윤유석 선생님의 학문적 역량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문제의식에 대한 논리적 서술이 탁월한 발표문이었다.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선생님의 지적 역량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부족한 내가 논평자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걱정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논평을 수락한 내 입을 수차례 원망하면서 발표문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는데…’ 나의 앎의 범위가 협소하여 하이데거 철학의 본의를 제대로 적용해 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발표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 안 하느니 못한 논평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여러 가지 걱정이 앞섰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발표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5번 정독했다. 그러고 나서, 정확한 문헌적 해석적 근거를 즉각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발표자의 논리대로 하이데거 철학을 적용했을 때 나의 관점에서 어색하게 느껴지거나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을 찾고자 노력했다. 나로서는 해 본 적이 없는 생각의 결을 더듬어가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을 중심으로 발표자의 해석에서 좀 더 보완하면 좋을 것 같은 부분을 찾아 나갔다. 논평을 준비하면서 나의 지적 풍토 내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져 의문조차 품지 않았던 사유의 분열적인 흐름들을 검토해 볼 수 있었다. 논평의 책무가 돈 주고도 할 수 없는 공부를 시켜준 셈이다. ‘무조건 해야 하는 거구나’ 대회 당일, 학문후속세대 발표장은 초반까지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다. 한 차례 날선 논평이 지나간 이래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차츰 잘 준비된 발표와 논평을 맡은 교수님들의 진심 어린 조언, 그리고 지켜보는 청중들의 관심이 잘 어우러져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학문후속세대 분과에 걸맞은 생동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특유의 울렁증으로 인해 논평문에 머리를 박고 원고를 읽기 바빴지만 전국의 철학자들이 모인 축제의 장에서 미약하나마 소임을 다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전율케 했다. 굳이 누가 나서서 말하지 않아도 철학이라는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 그리고 연대의식이 분명 그 현장에 존재했다. 한편, 나는 그날 난생처음 시도한 논평의 자리에서 역시 논평자로 오신 나의 석사학위논문 지도교수님을 만났다. 조금 늦은 나이에 학문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결단하게 해 주신 인생의 은사님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내게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주었다. 논평을 준비하며 겪었던 끝없는 열패감과 후회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조건 해야지 득이다’라는 체험을 몸소 깨달은 것이다. 이상형 교수님의 “그냥 하면 됩니다”의 의미를 온몸으로 수긍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논평, 그 후?’논평이라는 영역에는 논평을 주고받는 이들 간에 우발적인 서사가 존재한다. 발표자든 논평자든 간에 스스로에게 내재 되어 있는 학문적 아집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로부터 표출되는 설익은 비판, 미성숙한 방어, 우문우답이 뒤섞여 다듬어지지 않은 담론의 장이 형성되고 연구자들의 학문적 소신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러한 이유로 논평을 주고받는 자리가 두렵고 피하고 싶기만 했다. 그러나 자아와 방어 기제의 그 혼돈스러운 뒤얽힘 속에서 공명하는 단 하나의 지점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다면 연구자로서 한 걸음 성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한 이상, 내게 ‘논평=평가’라는 등식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논평은 논자의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논자가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거칠고 성말라 보이는 사유의 길로 초대하는 체험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가는 논평 속에서 마주치는 우발성의 힘을 믿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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